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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I PeaceNet] 국제정치와 평화의 이상: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자유주의적 조명
등록일
2026-06-11
조회수
31

[기획자 註]
 

지난 2022년 2월에 발발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양국간 협상이 난망한 가운데, 이번 전쟁으로 인해 국제질서가 향후 어떻게 변화하게 될 것인지 근본적으로 고찰해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고는 자유주의적 관점에서 전쟁의 원인과 배경을 이해해보고자 하며, 나아가 전쟁을 종식하기 위해서는 앞으로 어떠한 인식과 노력이 필요한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기획: 박동준 연구실장(djpark@jpi.or.kr)].
 



들어가며

제2차 세계대전 후 세계는 6.25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을 제외하면 강대국들 사이에 큰 전쟁 없이 지내왔고, 존 가디스(John L. Gaddis)는 이것을 ‘장기간의 평화(long peace)’라고 불렀었다. 6.25 한국 전쟁이나 베트남 전쟁 역시 비극적인 큰 규모의 전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세계는 교통, 통신이 요즘처럼 신속하지 않아서 일반인들이 이러한 전쟁들의 심각성을 모르는 상태에서 일상생활을 영위했기 때문에 평화 시대로 여겼을 수 있다. 하지만 오늘날 세계에서는 걸프전쟁 당시 유행하였던 ‘CNN효과’로 인해 지구상의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일어나는 전쟁도 그 살상과 파괴의 모습이 사람들에게 시시각각으로 생생하게 전해진다. 이와 같은 통신의 발달 속에서 전쟁 관련 소식을 접하며 그 참화를 더욱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1989년 8월,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대통령이 쿠웨이트를 무력으로 점령하여 촉발되었던 제1차 걸프전쟁에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다국적군 구성을 승인함으로써 미국 등 여러 국가들의 개입으로 쿠웨이트의 국가 주권이 비교적 단기간에 회복되었다. 당시 세계사회는 유엔이 원래 설립목적대로 국제평화를 위해 역할을 수행하는 ‘신국제질서(new international order)’가 도래했다는 행복감에 젖어있었다. 이러한 신국제질서는 냉전 기간을 통하여 세계 전체를 놓고 동서 대립의 한 축을 담당했던 소련 중심의 사회주의 정치체제와 정권들이 무너지고, 미국 중심의 자유주의 정치이념과 체제가 도래한 것으로 이해되었다. 이러한 분위기를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 프란시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가 말한 역사발전의 마지막 단계로서 자유 민주주의 정치체제 시대의 도래였다.
 

당시 세계의 강대국들은 미국의 조지 W. H 부시 대통령, 소련의 미하일 고르바쵸프 서기장, 그리고 중국의 장쩌민 주석이 지도자로 있었다. 이들 지도자들이 활동하는 가운데 유엔은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안전보장이사회를 비롯하여 각 기관들이 그 설립 취지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작동하였다. 원래 제2차 세계대전의 참화 속에서 후세를 또 다른 전쟁으로부터 구하기 위하여 수립된 평화기구인 유엔의 취지에 부응하여 이러한 강대국의 지도자들이 단합하였던 것이다. 나아가, 원래 설립 당시부터 인권보호 관련 조항들을 그 헌장에 담고 있었던 유엔은 이제 인권 보호를 제도적으로 더욱 강화하기 위해 2006년 기존의 인권위원회(Commission on Human Rights) 대신에 보다 격상된 인권이사회(Human Rights Council)를 도입하였다. 이후 세계사회에서 전개된 일련의 평화 분위기 속에서 대표적인 국제정치학 교과서의 하나인 『세계정치론: 경향과 변환』의 저자 섀논 블랜튼(Shannon Blanton)과 찰스 케글리(Charles Kegley, Jr)는 오늘날 국가 간의 전쟁이 사라질 수 있다는 낙관론을 주장하기도 하였다.1)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날 세계는 종종 국가 내 무력분쟁 즉, 내전과 국가 간 전쟁이 드물지않게 일어나 인명 살상과 삶의 터전 파괴를 야기하고 있다. 이 중에 러시아는 구 소련의 중심 국가로서 2000년 초 이래 조지아, 몰도바, 체첸니아 등지에서 무력 사용을 하였고, 2014년 3월 크리미아공화국을 합병하였으며, 2022년 2월에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전면적 침공을 시작한 이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또한 2023년 10월 팔레스타인의 무장정파 하마스가 이스라엘에 대한 대규모 무력 공격을 함으로써 촉발된 가자지구의 전쟁은 이제 막 휴전 상태로 들어갔을 뿐이다. 이러한 전쟁으로 야기된 상흔은 언제 치유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이에 더하여 세계 곳곳에서 불안한 정세가 지속되고 있다. 가까이 중국과 대만 사이 그리고 한반도의 남한과 북한 사이에도 긴장이 높은 상태에 있다. 동북아 지역의 양안관계 그리고 한반도의 남북 관계는 당사국들이 향상된 경제력을 바탕으로 고도의 잠재적 살상력과 파괴력을 갖는 무기들을 보유한 상태에서 대치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세계사회의 여러 곳에서 악화 일로에 있는 안보상황을 보면서 그 근본 원인이 무엇이며 평화를 위한 접근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서는 논의의 편의상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사례로 하여 그 배경 원인 등에 관한 논의들을 검토하고, 그로부터 평화를 위해 주의를 기울여야 할 원칙들에 대하여 논의하고자 한다. 이러한 시도에 있어서 필자는 국제관계론에서 활용되는 주류 이론적 시각들 중 하나인 자유주의를 통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하여 조명하고자 한다. 즉, 전쟁과 평화의 문제에 대하여 러시아의 지도자 푸틴의 개인 기본권으로서 자유에 대한 인식, 러시아 국가 정치체제와 그 운영방식, 그리고 국가 간 관계에 대한 접근 등을 중심으로 논의하고자 한다. 이러한 측면들은 서로 연관된 상호작용 속에서 오늘날 진행되고 있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투영되고 있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그에 대한 관점

 

국가 공동체로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밀접한 관계는 유럽 중세시대의 9세기에 존재했던 키예프 루스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20세기에 들어서는 1917년 레닌이 주도한 볼셰비키 혁명 후 1922년에 우크라이나가 소비에트 연방의 한 창립 구성공화국이 된 사실이 있다. 주지하다시피, 이후 약 70여년 간 공산권의 지도국가였던 소비에트 연방국가가 1991년 12월 공식적으로 해체되면서 다른 구성 공화국들과 함께 우크라이나도 독립을 얻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소비에트 연방의 중심 국가였던 러시아 연방과 그 구성 공화국들 중 하나였다가 독립한 우크라이나는 이후 러시아와 오랜 애증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러시아의 국내 정치상황과 그 지도자들의 정책적 관점 그리고 미국 및 서방 자유진영 국가들을 아우르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이하 나토)와의 상호관계가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였다. 고르바쵸프 대통령 당시의 소련에서 구성 공화국들이 독립을 얻었고, 그를 승계한 보리스 옐친 대통령은 공산주의 정치체제를 포기하고 시장경제를 도입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혼란의 수습에 전념하느라 우크라이나 등 이전 소련의 구성 공화국들에 대하여 손쓸 겨를이 없었다. 그러나 2000년 옐친 대통령의 후임으로 블라디미르 푸틴이 대통령직을 승계하면서 점차 러시아 연방의 국내 상황이 안정을 되찾았다.


푸틴 대통령은 소비에트 연방 당시의 강대국 위상을 되찾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고 그것은 러시아 국내외 정세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소비에트 연방이 분열되는 상황에서 새롭게 독립한 이전 구성 공화국들 내에는 연방 당시 그 곳에 정착하여 살던 러시아인들이 상당수 잔류하고 있었다. 푸틴 대통령은 이전 구성 공화국들이 다시 러시아의 영향권 아래에 들어와 함께 하기를 바랐는데 여의치 않은 경우 그 곳에 거주하고 있던 러시아 소수민들을 지렛대로 활용함으로써 내전이 촉발되곤 하였다. 러시아 남부의 조지아 공화국, 몰도바 공화국 그리고 체첸 공화국 등이 좋은 사례로서 푸틴 대통령은 이들 공화국들에 무력 개입을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연장선 상에서 2014년 3월 1954년 이래 우크라이나 영토로 존재해왔던 크리미아 공화국을 러시아 연방에 합병하였으며 이어서 우크라이나 동남부 돈바스 지역의 도네츠크 인민공화국과 루한스크 인민공화국에서 친 러시아인들을 통하여 독립을 선언하게 한 후 이를 러시아 연방에 다시 편입하였다. 곧이어, 푸틴 대통령은 ‘특별군사작전’이라는 이름으로 2022년 2월 24일 오전 6시 약 20만 명의 무장병력을 동원하여 우크라이나에 대해 전면적 침공을 개시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푸틴 대통령은 처음에 이 침공을 ‘특별군사작전’이라 부르며 우크라이나에 대한 전면 전쟁 사실을 부인했지만 나중에 그도 인정했듯이 이것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유럽에서 벌어진 최대의 전쟁으로 평가된다. 그는 이 전쟁이 시작된 후 수일 내에 우크라이나의 수도인 키이우를 점령하고 친 서방 젤렌스키 대통령 정부를 제거하여 우크라이나를 다시 러시아의 영향권 아래 둘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였었다. 하지만, 이 전쟁은 그의 기대와 달리 시작된 지 3년 8개월이 지난 이 시점에도 상호 공격을 주고받으며 살상과 파괴가 지속되고 있다. 이와 관련한 정확한 통계수치를 확인할 수 없지만, 양측 모두에 있어서 현재까지 이 전쟁을 통해 목숨을 잃은 전투병은 수십만 명에 이르며 비전투병인 민간인들도 우크라이나의 경우 약 13,500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으로 회자된다.2) 러시아 역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것은 물론, 전사한 병사의 수는 약 이십만 명 전후로 추산되고 있다.3)


이러한 전쟁상황에 대하여 그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에 관한 논의가 있어 왔다. 이러한 논의들을 모두 검토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대체로 두 가지 입장으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러시아의 푸틴 정권이 불법적으로 우크라이나에 대해 전쟁을 도발했다는 견해이고, 다른 하나는 러시아 푸틴 정권의 전쟁 시작이 그 동안의 전반적인 정세 흐름상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견해이다. 예를 들면, 처음 이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미국의 바이든 행정부와 나토, 유럽연합(EU) 국가들은 이 전쟁의 불법성을 강조하며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원조와 함께 러시아에 대한 즉각적 제재조치들을 가하였다. 그리고 2025년 1월 미국의 제2기 트럼프 행정부가 출범하면서 최근 푸틴 대통령과의 알래스카 정상회담 개최 등을 통해 휴전 등 수습노력을 경주했지만 글을 쓰고 있는 현재 아직 협상은 진행 중에 있다. 학자들 중에도 러시아의 침략이 불법적이며 푸틴의 지도력 특징에서 전쟁의 원인을 찾는 견해들이 있다. 이러한 견해들은 우크라이나가 전통적으로 러시아와 하나의 영토였다는 등 푸틴 대통령의 주장을 반박하고 이 전쟁의 불법성을 주장한다.4)


다른 한편으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의 전쟁에 대하여 러시아 푸틴 대통령의 정당화 입장에 동정적인 견해들이 존재한다. 푸틴 대통령은 이 전쟁을 시작하면서 장문의 담화문을 발표하여 그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하였다. 푸틴 대통령의 담화문에 따르면 전쟁의 이유와 목적으로 나토 회원국의 확대와 동진에 따른 러시아 안보에 대한 위협이 제시되고 있다. 즉, 푸틴 대통령은 나토가 러시아의 역사적 영토인 우크라이나에 적대적인 ‘반러시아’를 만들고 있다고 비난하며 이것은 러시아에게 있어 삶과 죽음의 문제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보다 구체적으로 유엔 헌장 7장 51조에 따라 우크라이나 내의 도네츠크 인민공화국과 루한스크 인민공화국을 원조하기 위해 무력행동을 결정했으며 그 목표는 우크라이나 정권으로부터 학대와 학살을 겪어온 사람들을 보호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의 비군사화와 비나치화를 달성하고 관련 책임자들에게 법적 책임을 묻겠다고 하였다.5)


푸틴 대통령의 담화문 내용을 전체적으로 볼 때 놀라운 것은 일반적으로 민주정치 담론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개인의 자유와 평등, 정의, 자결, 유엔 헌장의 집단자위권 등의 용어들에 대한 구사를 통해 러시아가 정의의 편에 서있는 반면에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 국가들이 오랜 시간 러시아에 대하여 거짓과 억압으로 일관하고 있음을 주장한 것이다. 이것은 국제정치 문제를 인지심리학적으로 접근할 때 사용되는 개념으로서 ‘거울이미지(mirror image)’6)의 전형적인 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국내외 러시아 전문가들과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자들 중 상당 수가 푸틴 대통령이 느껴온 미국 등 서구 국가들의 부당성을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즉, 1991년 소련이 붕괴된 이후 심각한 수세에 몰려있던 러시아 연방에 대하여 미국 등 서방 국가들이 나토 등을 앞세워 지속적으로 압박 정책을 추구해왔고, 그에 대하여 푸틴 대통령이 반발하는 것은 당연하며, 그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전쟁도 그 연장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7)


국제관계에 있어서 전쟁 등에 이를 만한 사안들은 흔히 지정학적 복잡성을 띠게 마련인 것을 감안할 때, 그 전쟁의 당사국들은 물론이고 그것을 관찰하는 분석가들 사이에서도 다양한 견해와 입장이 존재할 수 있다. 그리고 심지어 상반된 견해까지도 존재할 수 있다. 따라서 여기에서 필자는 이러한 논의에 참여한다는 의미에서 나름대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관련하여 국제관계에서 많이 활용되는 자유주의적 시각의 견지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특히 이 전쟁의 개시와 함께 발표된 러시아 푸틴 대통령의 담화문을 바탕으로 비판적 견해를 전개하고자 한다. 여기서 자유주의적 시각은 칸트의 영구평화론에서 볼 수 있는 내용을 중심으로 접근하고자 한다. 자유주의적 시각 역시 다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유주의와 평화에 대한 그 접근 


전쟁과 평화라고 하는 문제는 현실주의에서 흔히 보여지는 것처럼 일반적으로 국가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어떤 현상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그것은 사람들의 사물에 대한 관점에 뿌리를 두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전쟁과 평화 관련 정책을 결정하고 실행하는 지도자들이 인간과 인간 간의 관계 그리고 그러한 인간들이 모여서 형성하는 국가를 비롯한 다양한 수준의 공동체들 그리고 그러한 공동체들 간의 관계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과 깊은 관계가 있다. 즉, 이러한 관계를 바라볼 때 매개적인 역할을 하는 개념들 중에는 정의(正義, justice), 이익(利益, interests)이라는 관념들에 매개되는 상황과 맥락에 대한 이해가 작용한다. 정치공동체의 중심적 구성주체로서 사람들의 삶은 다양한 정신적 및 물질적 요소들이 상호작용하는 복잡한 맥락 속에서 전개된다.


기본적으로 전쟁과 평화라는 두 관점에서 보면 사람들은 당연히 평화를 선호할 것이다. 왜냐하면, 평화만이 국가 지도자들을 포함하여 자연인으로서 사람들이 가장 귀하게 여기는 생명체의 안전한 생존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지도자들을 포함하여 사람들은 인간관계 그리고 그 연장으로서 국가 간의 실제 관계에 대하여 서로 다른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다. 그와 같이 서로 다른 관점들은 사람들과 국가들의 행동을 추동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하는데 개인 간 또는 국가 간 전쟁도 종종 이러한 관점들의 상호작용 과정에서 나타나는 충돌로 볼 수 있다. 이러한 관점의 충돌은 어떤 갈등 상황이 발생했을 때 어떤 요소들이 더 중요하거나 덜 중요한 지에 대한 해석의 차이로 인해 부정적 상승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 인류의 오랜 역사를 통하여 일어났던 수많은 전쟁들도 이러한 측면에서 해석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 중 한 사람 한 사람 각자가 천부적으로 자유의 속성을 지니게 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서로 평등한 관계에 놓인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사람들은 현실에서 다양한 형태의 불평등 속에 살아간다. 여기에서 존 롤즈(John Rawls)가 말하는 ‘무지의 베일(veil of ignorance)’ 개념이 도입될 수 있다. 선험적으로 자유롭고 평등한 것으로 가정된 사람들의 관계는 한 개인의 자유가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해해서는 안된다는 공리에 의하여 역설적으로 자유가 제한받는 결과로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역설 속에서 공평성을 지향하는 상호성을 바탕으로 개개인의 자유는 제한될 수 있고 그러한 제한을 투명하고 공식화하기 위해 도덕 및 법 같은 규범들이 형성, 존재하게 된다. 이러한 도덕과 법 규범은 국내사회 뿐만 아니라 국제사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오랜 옛날에는 지구의 물리적 공간 전체를 통하여 사람들 사이의 상호작용이 지극히 제한적이어서 인류사회의 보편적 도덕과 법에 관심이 적었지만, 오늘날과 같이 교통, 통신이 현저히 발달한 시대에는 지구 인류사회 전체에 적용되는 보편적 도덕 및 법 규범이 엄청난 양으로 늘어난 것은 자연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자유주의는 인간관계 그리고 그러한 인간들로 구성된 국가 공동체 내 그리고 국가 공동체간 관계를 어떻게 보는지 간략히 논의한다. 이것을 흔히 국제정치학 분야에서 말하는 세 가지 분석 수준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자유주의의 이론에서 그 핵심적 주체로 인정되는 개인이라는 존재는 어떻게 상정되어 왔는가? 근대유럽에서 자유주의 정치사상의 선구자들인 홉스(Thomas Hobbes), 로크(John Locke) 등은 중세시대 등 기존의 신의 지배 하에 있는 인간이라는 관념에서 벗어나 자율적인 존재로서 인간을 상정하고 체계적으로 담론을 전개하였었다. 유럽의 중세라는 오랜 기간을 통하여 보통의 사람들은 신 그리고 그의 가르침의 기술서로서 성경, 그리고 그것을 가르치는 성직자들의 권위가 절대시되는 환경 속에서 삶을 영위하였다. 그러나 유럽 근대시기로 들어오면서 이러한 분위기에 전환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인간 본성의 한 요소로서 초월적 이성의 역할에 대한 강조에서 비롯되었다. 즉, 성경을 비롯하여 그 어떤 것도 인간의 이성에 비추어 철저히 검토된 후에 수용 또는 거부될 수 있는 것으로 주장된 것이다. 이것을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 기존의 ‘신의 주권(divine sovereignty)’ 대신에 ‘이성의 주권(sovereignty of reason)’제창이었다.8)
 

이러한 근대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자연상태 하의 자유롭고 평등한 인간들을 상정하였는데 이러한 인간들은 각각 생명, 자유, 재산이라고 부를 수 있는 자연권을 지니는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개인들은 자연상태에서 지니는 그들의 자연권을 더욱 확실히 보호하기 위해서 오늘날 우리가 운영하는 정부를 수립한 것으로 상정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정부는 홉스와 로크에 있어서 서로 다른 성격을 띠는 것이었다. 즉, 홉스는 사람들이 그들의 자연권을 보호하기 위해 사회계약을 통해 수립한 정부에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하는 것으로 보았다. 반면에 로크는 이러한 정부에 대한 복종은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자연권을 구성하는 세 가지 요소, 즉 사람들의 생명, 자유, 재산권 등을 정부가 제대로 보호하고 존중한다는 애초의 설립 목적에 부합할 때만 수용되고 그렇지 않을 때는 저항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홉스와 로크 두 정치사상가들 사이에 자연권을 보호하기 위해 정부가 설립된다는 내용은 동일하지만 그 정부에 대한 절대 복종과 조건부 복종으로 나뉘는 것은 이 두 사상가들이 인간의 본성을 어떻게 보며 그러한 인간들이 국가가 수립되기 전의 자연상태에서 어떤 상태로 삶을 영위하는가에 대한 가정과 관련이 있다. 주지하다시피, 홉스는 인간들의 본성에 대하여 자기 중심의 이기적인 것으로 보아서 정부가 수립되기 전인 자연상태를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war of all against all)’으로 규정하고 그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절대적인 권력으로서 주권을 행사하는 정부 또는 국가가 존재한다고 하였던 것이다. 반면에, 로크는 자연상태에서 사람들은 정부가 수립되기 전에도 비교적 평화로운 상태에서 삶을 영위하는 것으로 보았는데 다만 종종 일부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자연권을 해치는 경우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이에 대비하여 정부가 필요하다는 입장이었다. 그리하여 로크가 상정하는 정부는 언제나 무조건적으로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자연권을 보호한다는 전제조건 하에 놓여 있었다.
 

이렇게 볼 때 홉스에게 주권의 소재처는 국가 정부 한 곳에서만 상정될 수 있었지만 로크에게는 보다 본원적인 의미의 주권은 생명, 자유, 재산권의 주체로서 개인들의 집합체인 국민들에게 존재하며, 그로부터 파생된 그리고 위임된 형태의 주권만이 국가 정부에 존재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런데 이처럼 홉스와 로크가 그들의 정치이론에서 서로 다른 입장을 취하게 되는것은 바로 인간의 본성을 선한 것으로 보았느냐 아니면 악한 것으로 보았느냐 하는 데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인간의 본성은 자연의 사물처럼 눈에 보이지 않고 일상 삶 속의 경험세계에서 사람들마다 다르게 볼 수 있기 때문에 그에 대하여 전적으로 선하다거나 또는 악하다고 단정적으로 말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즉, 인간의 본성에 대한 관점은 정치이론을 전개해 나가는 데 있어서 하나의 예비적 가정의 성격을 띨 수밖에 없다. 사실 국제관계이론 중 현실주의와 자유주의는 이 두 사상가의 사상적 관점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자유 문제를 논의하는데 있어서 인간 본성의 근원적 차원으로서 도덕 또는 윤리적 잠재성과 관련하여 논의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와 관련하여 칸트는 홉스나 로크의 논의를 넘어 ‘정언명령(categorical imperative)’이라는 개념을 통해 인간의 이성에는 인간의 도덕성 또는 도덕 원리의 기초로서 인간의 자율성이 내재되어 있음을 지적하였다. 또한 이러한 인간의 자율성이 인간 도덕성의 전제 또는 가능 조건임을 논파하였다. 그리하여, 칸트는 인간에게 있어서 ‘도덕적이고자 하면 자율의 원리에 따르고, 자율적이고자 하면 보편적 도덕의 원리에 충실하라’는 도덕 규범과 인간 자율성의 상호 내재적이며 내포적인 측면에 주목하였다.9)


이러한 칸트의 도덕철학은 ‘자유’의 개념에 기초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자유’는 초월적 이성과의 관련 속에서 상정될 수 있는 것으로 인간은 자신의 자유의사에 따라 행동하는 주체로 간주된다. 칸트에 따르면, 이러한 주체는 그 행위들에 대해 귀책능력이 있어서 ‘인격’이라 일컬어지는데 마땅히 해야 할 바를 행해야만 하고 그것을 책임진다는 것이다. 여기서 마땅히 행할 바의 규정, 즉, 법이나 도덕 같은 당위의 법칙들은 인간이 그 자신에게 부과했다는 의미에서 자율로 본다. 이처럼 이성적 존재자로서 인간은 그 자체로서 가치를 가지며 다른 어떤 것에 의해서도 대체될 수 없는 목적적 존재자라는 것을 강조하였다.10)

도덕적 존재자로서 인간은 그 권리 곧 인권(human rights, menschenrecht)을 갖게 되며 이것은 사람이면 누구라도 한낱 수단이 아니라, 동시에 목적으로 살고 대우받을 권리를 의미한다. 칸트는 이러한 인격 안의 인격성의 권리들 및 인간들의 권리 외에 세상에서 더 신성한 것은 없다고 하였다. 이러한 인권은 모든 인간에게 그가 인간이라는 바로 그 힘으로 인하여 귀속하는 근원적인 권리로서 그러한 보편적 인권의 원리들은 곧 자유, 평등, 안전이라고 하였다. 칸트에 따르면, 이러한 인권의 으뜸은 자유의 권리로서 바로 타인의 강요적인 의사로부터 독립이며 모든 타인의 자유와 보편적 법칙에 따라 공존할 수 있는 한도에서 보장되어야 하는 것이다.11) 이 자유는 각자가 좋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자기의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권리를 핵심요소로 갖는다.


인간, 그리고 인간의 자유와 평등, 안전 등의 원칙에 따라 칸트는 인류사회의 지속적인 평화 가능성을 논의하는데 그 결과가 바로 그의 영구평화론이다. 1795년 프랑스 시민혁명과 이후 전개된 나폴레옹 전쟁을 지켜보며 집필된 이 논문에서 칸트는 영구평화를 위한 필요 조건들을 논의, 제시하였다. 그는 이 논문을 작성함에 있어서 평화조약문 같은 형식을 취했는데 그 확정조항들에서 먼저 시민들이 자유와 평등의 권리를 갖는 공화주의적 헌정체제를 가져야 함을 규정하였다. 왜냐하면, 어떤 국가의 공화주의 정치체제에서는 자유와 권리의 주체인 시민들이 그들의 의사에 반하는 통치자의 자의적인 결정에서 비롯되는 전쟁을 거부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이러한 공화주의 정체를 가진 국가들끼리는 전쟁하지 않을 것이라는 공화주의 또는 자유주의 평화론, 그리고 오늘날 민주평화론이 등장하였다. 칸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러한 공화주의 국가들이 연맹을 형성함으로써 공화주의 정치체제가 아닌 국가들이 일으키기 쉬운 전쟁에 공동으로 대항할 수 있다고 하였다.

칸트의 이러한 평화구상이 실제 정책으로 추구된 것이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 무렵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주도에 의해 창설된 국제연맹과 그 집단안보체제였다. 집단안보체제는 세계의 구성 국가들이 하나의 집단을 형성하여 그 구성국가들 중 어느 한 국가가 공동의 평화질서를 파괴하는 경우 그에 대해 나머지 국가들이 공동으로 대응하는 제도적 장치이다. 국제연맹에 이어서 등장한 국제연합, 즉 유엔도 기본적으로 같은 집단안보 구상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집단안보를 통한 세계평화의 추구는 양자 또는 제한된 국가들 간의 안보동맹에 기초하여 세력균형을 추구하는 현실주의 평화이론과는 분명히 다른 점이 있다.

칸트의 영구평화론에서 다시 주목할 만한 점은 그 예비조항들에서 영토의 거래, 불간섭 원칙, 종전 후 화해를 불가능하게 할 끔찍한 행위들을 금한 것이다. 즉, 아무리 국가 간 전쟁이 일어날지라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극한적 수단까지 동원하여 싸우기보다는 준수해야 할 규칙이 있음을 강조한다. 이러한 점은 유럽 사상사에서 오랫동안 논의되어 온 ‘정의로운 전쟁론(just war theory)’의 개념과 직결되는 것으로 국가 사이의 전쟁은 그 시작에 있어서 정당성을 확보해야 하며, 일단 개시된 전쟁의 수행에 있어서도 비례성의 원칙 등 지켜야 할 원칙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의를 바탕으로 다음에서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하여 논의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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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자: 박동준 제주평화연구원 연구실장, 편집 : 제주평화연구원 이혜진 연구원


오영달 (충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충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이다. 영국 아버리스트위드대학교(Aberystwyth University)에서 국제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주요 연구 분야는 국가주권과 국제인권과의 문제, 유엔 등 국제기구, 한국 정치사 등이다. 주요 논문으로는, “안중근의 자기희생과 한국의 보훈이념: 민주주의, 국가독립 및 수호, 그리고 세계평화,” 『한국동양정치사상사연구』, 제24권 1호 (2025. 2), “Peace and conflict in Northeast Asia: A Liberal Perspective,” Evolution of the United Nations System: An East Asian Perspective (Abingdon, UK: Taylor & Francis Group, 2023), “대한민국의 건국 시기에 대한 논쟁의 재조명: 이중주권론의 시각,” 『한국동양정치사상사학회보』21권 1호 (2022년 3월), “주한 유엔군사령부와 한반도 평화” 『외교』 제139호(2021. 10.)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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