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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록강을 건너는 정교한 셈법(이상수, 前초빙연구위원) [출처: 통일뉴스]
날짜
2026-10-27
조회수
19
북한 최고지도자의 대외 행보는 언제나 동북아 지정학의 지형도가 요동치는 진앙을 가리킨다. 2026년 10월 24일 단행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중국 방문은 이러한 외교적 상징성의 정점을 보여주면서도, 동시에 기존의 모든 문법을 비틀어버린 전례 없는 파격을 연출했다. 과거 다섯 차례의 방중이 모두 베이징에서 시진핑 국가주석과의 성대한 정상회담으로 귀결되었던 것과 달리, 이번 행보는 단둥이라는 접경 도시에서의 당일치기 일정에 그쳤으며 그의 맞은편에 선 인물은 국가수반이 아닌 중국 권력 서열 4위 왕후닝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 주석이었다.

이러한 이례적인 장면을 마주하며 국제정치 분석가들은 즉각 분주해졌다. 일각에서는 11월 성사될 수도 있는 북미회담을 앞둔 북·중간 사전정지 작업임을 논하고, 다른 일각에서는 항미원조 76주년이라는 역사적 계기와 신압록강대교의 개통으로 북·중관계의 완전한 정상화와 혈맹의 재확인이라고 평가한다. 그러나 이번 북·중 만남은 미·중 전략경쟁과 북·러 밀착이라는 거대한 구조적 압력 속에서 각자의 생존과 이익을 지키기 위해 정교하게 조율된 위험 관리이자, 철저하게 계산된 기능적 수렴의 산물이다.

현상을 해독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해체해야 할 것은 이념적 수사로서의 혈맹이라는 신화다. 흔히 북·중관계를 입술과 이의 관계인 순망치한으로 묘사하지만,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의 렌즈를 통해 본 양국의 역사는 상호 불신과 전략적 경계의 연속이었다. 강대국과 약소국의 동맹 역학에는 언제나 두 가지 실존적 공포가 교차한다. 약소국인 북한은 중국이 자국의 안보를 미·중 패권 타협의 제물로 삼거나 내정에 깊숙이 개입할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반대로 지역 패권국인 중국은 통제되지 않는 북한의 핵 도발이나 군사적 모험주의로 인해 한미일 삼각 군사협력이 강화되고, 원치 않는 군사적 충돌에 휘말리게 될 것을 경계하는 연루의 공포에 시달린다.

이러한 상호 공포는 최근 북한이 우크라이나 전쟁 국면을 틈타 러시아와 위험 수위에 가까운 군사적 밀착을 과시하면서 극대화되었다. 북한의 입장에서 모스크바라는 대안 축의 확보는 대중국 의존도를 낮추고 전략적 자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고전적인 헤징 전략이다. 역사적으로 중소 분쟁기마다 양측의 대립을 레버리지 삼아 생존 공간을 확보했던 평양의 외교적 유전자가 다시금 발현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급진적 행보는 베이징에게 심각한 딜레마를 안겼다. 북한에 대한 독점적 영향력을 러시아에 잠식당할 수 없다는 불안감과, 북한의 무모한 도발이 몰고 올 전략적 역풍을 분담할 수 없다는 회피 심리가 동시에 작동한 것이다.

김정은 위원장이 베이징이 아닌 단둥에서 왕후닝을 만났다는 사실은 바로 이 모순된 이해관계를 처리하기 위해 고안된 외교적 타협의 결과물이다. 의전의 층위에서 국가원수 간의 정상회담을 생략함으로써 중국은 국제사회에 중요한 신호를 발신했다. 북한의 군사적 급진주의와 무조건적으로 보조를 맞추지는 않겠다는 전략적 거리두기다. 시진핑 주석의 직접 대면을 유보함으로써 중국은 서방과의 관계 파국을 방어하는 한편, 한반도 정세의 통제권을 완전히 넘겨주지 않았음을 입증했다.

동시에 중국 권력의 최고 이론가이자 통일전선 공작의 정점에 있는 왕후닝을 접경지 단둥으로 파견한 것은 결코 북한을 버리지 않겠다는 최소한의 보증수표였다. 항미원조기념탑 공동 헌화와 열사 추모는 양국의 공통분모인 반제국주의 서사를 환기시키는 데 부족함이 없었으며, 시진핑 주석의 따뜻한 안부를 대독하는 형식을 취함으로써 동맹의 파열이라는 최악의 해석을 원천 차단했다.

나아가 단둥이라는 공간과 준공 12년 만에 열린 신압록강대교가 가지는 지정학경제학적 의미를 간과할 수 없다. 국제사회의 고강도 제재와 장기화된 고립 속에서 북한 경제의 유일한 숨통은 여전히 중국과의 국경선이다. 러시아로부터 첨단 군사기술이나 단기적 에너지 지원을 얻어낼 수는 있을지언정, 북한 주민의 생필품 공급과 산업 전반을 지탱할 물리적 교역망은 결국 중국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김 위원장이 신압록강대교를 직접 건너고 단둥의 자동차 공장을 시찰한 것은 북한 내부의 경제적 요구가 절실했음을 방증한다.

중국 역시 북한 체제가 경제적 붕괴의 임계점을 넘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는다. 북한 정권의 급변 사태로 인한 난민 유입과 국경선 부근의 안보 공백은 중국의 핵심 이익을 정면으로 타격하기 때문이다. 왕후닝 주석이 무역 협력 확대와 전략적 소통을 강조한 것은, 정치 군사적 차원에서는 거리를 두더라도 국경 통상구 개방과 실질적 경제 협력을 통해 북한의 최소 생명선을 유지해 주겠다는 베이징의 현실적 타협안을 명시한 것이다. 즉 이번 단둥 회동은 군사적 모험주의에 대한 경고와 체제 안정을 위한 경제적 산소 공급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는 중국의 미세 조정이었다.

결국 김정은의 단둥 방문은 북·중관계가 낭만적 이념 공동체가 아니라, 고도로 파편화되고 상호 견제적인 이익의 결합체임을 명징하게 보여주었다. 북한은 중국에 완전히 종속되지 않으면서도 경제적 활로를 확보하기 위해 역사적 우의를 활용했고, 중국은 과도한 안보 연루의 위험을 피하면서도 북한이라는 완충지대를 자국의 궤도에 묶어두기 위해 통제된 환대를 베풀었다. 양측은 같은 공간에서 다른 시간표를 확인했고, 같은 다리를 건너며 서로 다른 목적지를 계산하고 있었던 셈이다.

이러한 다층적이고 모순적인 정세는 한국의 외교안보 정책에 엄중한 과제를 던진다. 북·중관계를 단선적인 반미 블록의 일체화된 축으로 단정하거나, 반대로 미세한 불협화음을 두고 곧장 동맹의 해체로 비약하는 이분법적 환상은 위험하다. 겉으로 드러나는 외교적 결속의 수사 이면에는 언제나 자율성을 향한 북한의 몸부림과 대가를 치르지 않으려는 중국의 계산이 팽팽한 장력을 형성하고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화려한 의전 뒤에 숨겨진 구조적 불일치를 정밀하게 읽어내는 독해력이다. 한미동맹과 한미일 협력의 확고한 억제력을 축으로 삼되, 북·중·러 연대의 내부 균열 지점과 이해 상충의 틈새를 찾아 외교적 레버리지로 치환하는 유연한 접근이 절실하다. 단둥의 신압록강대교 위에서 펼쳐진 북중 간 계산된 만남은, 감상이 배제된 냉혹한 국제정치의 현실 속에서 오직 냉철한 분석과 정교한 국익 계산만이 국가의 생존을 담보할 수 있음을 대변하고 있다.

출처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