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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의 결속, 워싱턴의 황혼: 푸틴 방중이 앞당긴 다극화의 실체(이상수, 초빙연구위원) [출처: 통일뉴스]
날짜
2026-06-09
조회수
436
베이징 서우두 공항 활주로, 그 뜨거운 아스팔트 위에서 냉전 이후 가장 기묘한 바통 터치가 이루어졌다. 도널드 트럼프의 에어포스원이 떠난 지 딱 96시간. 채 열기도 식기 전에 블라디미르 푸틴의 전용기가 그림자처럼 내려앉았다. 25번째 방문이라는 의례적인 숫자는 중요하지 않다. 진짜 무서운 건 ‘타이밍’이다. 워싱턴이 떠난 뒤 남겨진 그 서늘한 지정학적 진공 상태, 모스크바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그 틈을 정교하게 메워버렸다. 지금 우리가 목도하는 이 장면은 단순한 정상외교의 연속이 아니다. 국제 질서라는 거대한 판이 뒤집히고 있는, 그 아찔한 대전환의 압축판이다.

중·러는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 30년, 선린우호협력조약 25년이라는 기념비를 지렛대 삼아 국제 권력 구조를 판 갈이 하겠다고 선언했다. 서방 중심 질서에 균열을 내고 대안 체제를 세우겠다는 야심, 그것은 새로운 대결의 서막을 알리는 신호탄이기도 하다. 푸틴은 양국 관계가 '역사상 최고'라고 치켜세웠다. 립 서비스가 아니다. 루블과 위안화가 결제 시스템을 장악했고, 연간 2,000억 달러를 넘나드는 교역량은 서방의 제재를 비웃는다. 중국은 러시아 에너지를, 러시아는 중국에 자원과 기술을 공급하며 서로의 산소호흡기 노릇을 자처한다.

시진핑과 푸틴은 미국의 일방주의 패권 종식과 글로벌 거버넌스 재편에 전격 합의했다. 40건이 넘는 실무 협력 문서에 서명하며 결속을 다졌다. 중국은 미국과 러시아를 동시에 다루며 글로벌 전략의 중심축으로 도약하려는 노련함을 과시했다. 양국은 대외적으로 ‘3불’ 원칙을 내세우지만, 실질적 결속은 어떤 군사동맹보다도 단단하다. 이는 우크라이나 전쟁의 장기화를 지탱하는 핵심 동력이며, 서방의 제재망을 무력화하는 거대한 배후 지지대다.

트럼프 방중이 ‘현상 유지’를 위한 관리형 외교였다면, 푸틴의 방문은 베이징이 글로벌 외교 전장의 중력장으로 부상했음을 증명한다. 시진핑의 이중 헷징(Hedging) 전략은 이제 선명하다. 미국과는 경제적 안정성을, 러시아와는 전략적 반미 연대를 도모한다. 트럼프는 규격화된 의전으로 맞이하고, 푸틴은 왕이 부장이 직접 영접하며 전략적 무게감을 달리했다. 브릭스(BRICS)와 상하이협력기구(SCO)를 앞세워 서방의 ‘규칙 기반 질서 (Rules-based order)’를 해체하려는 수정주의적 의도는 명백하다.

탈달러화의 제도화는 단지 통화 다변화에 그치지 않는다. 에너지와 첨단기술, 공급망 전반을 아우르는 중·러 밀착은 권위주의 진영의 ‘연대형 안보’ 시금석이다. 이는 브레턴우즈 체제 이후 달러 패권의 기저에 균열을 낸다. 이 파장은 결코 의례적이지 않다. 북·중·러 삼각 협력을 격상시키며 한반도 안보 환경에 전례 없는 압박을 가하고 있다. 평양은 이를 지렛대 삼아 외교적 자율성을 극대화할 것이고, 기존의 비핵화 프레임은 ‘지역 안보 불균형 해소’라는 세력균형 논리에 의해 실효성을 위협받고 있다.

경직된 진영 논리에서 벗어나야 한다. 국익을 최 우선하는 냉철한 실용주의적 기동성이 절실하다. 이제 우리 외교의 나침반을 재조정해야 한다.

첫째, 경제 안보의 기능적 다원화다. 특정 시장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아세안(ASEAN) 및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로 공급망을 과감히 넓혀야 한다. 한중 FTA 후속 협상을 활용해 중국과의 실질적 완충지대를 확보하는 ‘투트랙’ 접근이 필요하다.

둘째, 안보 구조의 재설계다. 한미동맹의 핵심 기둥은 견지하되, 한·일·중 다자 메커니즘을 복원해야 한다. 중·러가 내세우는 ‘지역 안정’ 프레임을 역이용해 북한의 도발을 억제하고 외교적 운신의 폭을 넓히는 고도의 전략적 유연성이 요구된다.

셋째, 대러 외교 레버리지의 정교화다. 가치 기반 외교를 고수하더라도, 모스크바와의 비공식 물밑 채널은 멈춰선 안 된다. 평양과의 군사·기술 밀착이 불러올 최악의 시나리오를 선제적으로 차단하는 실효적 억제력이 곧 우리의 국익이다.

중국은 최근 5개월 동안 안보리 상임이사국 4개국 정상을 모두 베이징으로 불렀다. 미국과 러시아를 동시에 관리하며 새로운 핵심 축으로 올라서려는 노련한 계산이다. 화려한 조명 뒤엔 미국과의 경제적 상호의존과 러시아라는 전략적 짐이라는 복잡한 딜레마가 도사린다. 그러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중국의 속내가 아니다. 이 장면이 던지는 냉정한 메시지다. 글로벌 중추국을 자처하는 우리에게 수동적 관망은 생존 위협이다.

굳건한 한미동맹이라는 안보의 닻을 내린 채, 중국의 경제적 중력과 러시아의 전략적 변수 사이를 곡예 하듯 항해하는 일은 차원이 다른 정교함을 요구한다. 단순히 종이 위에 그럴싸한 다층적 네트워크를 설계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격랑을 헤쳐 나갈 구체적인 로드맵, 그리고 최악의 시나리오까지 대비한 치밀한 실행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외교는 그저 공허한 수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결국 국익은 책상 앞의 논리가 아니라, 폭풍우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과감한 결단력에서 비로소 완성된다.

출처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