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ENGLISH
- 정기간행물 - JPI PeaceNet
JPI PeaceNet
전염병과 사회적 도덕: 전염병을 마주한 인간에 대한 소고 By : 박규현 (성균관대학교 프랑스어문학과 초빙교수) JPI PeaceNet: 2020-09
PRINT : SCRAP: : FILE : (다운로드 : 호) (조회 : 347)
전염병과 사회적 도덕: 전염병을 마주한 인간에 대한 소고

박규현
성균관대학교 프랑스어문학과 초빙교수

들어가며


이웃나라 중국 우한에서 발생한 것으로 알려진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가 국내로 유입되어 지역으로 전파되자 한국 도시의 풍경은 확연히 달라졌다. 낮 동안 사람들로 북적이던 시장, 상점, 카페, 쇼핑몰, 음식점들은 한산해졌고 저녁이면 불야성을 이루던 유흥가나 술집들도 인적이 훨씬 드물어졌다. 사람들의 일상도 달라졌다. 직장인들은 재택근무를 하는 경우도 있고, 어쩔 수 없이 출근하는 경우에는 마스크를 끼고 조심스럽게 직장으로 향한다. 지하철이나 버스와 같은 대중교통을 이용할 시 사람들은 마스크를 쓴 채 옆 사람과 조금이라도 거리를 유지하려 애쓴다. 황사나 미세먼지가 없는 청명한 날에도 대부분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탓에 약국이나 슈퍼 등 오프라인 매장이나 온라인 매장에서는 마스크를 구하기 힘들게 되었고, 이제 일주일에 1인당 2매씩 배급 방식의 구매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러한 긴장된 일상생활이 이어지는 가운데 뉴스에서는 코로나-19 확진자 수와 사망자 수가 연일 발표되고 있다. 지리적으로 매우 가까운 나라, 많은 교류를 나누는 이웃 나라에서 발생한 일이기에, 한국은 다른 나라들보다 신경을 곤두세우고 추이를 지켜봄과 동시에 검역을 강화했음에도, 한두 명씩 코로나-19 확진 소식이 전해졌고 대구 지역 병원 장례식장에서의 집단 감염은 신천지라는 종교집단과 연관되어 이제는 확진자 수가 수천 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이것은 시작일지도 모른다. 문제는 전 세계적으로 전염병이 대유행하는 팬데믹 상태로 악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보다 확진자와 사망자 수가 많아진 이탈리아는 북부 롬바르디아주를 포함한 15개 주(인구 1600만 명 정도)에 대한 봉쇄 조치를 단행했고 급기야 국가 전체에 대한 봉쇄 조치에 들어갔다. 프랑스, 미국, 독일도 급속히 확진자 수가 늘었다. 전염병은 이처럼 개인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마을과 도시, 국가 전체를 위기에 빠뜨릴 수 있는 재앙으로 인식된다. 게다가 국경을 넘는 인적 교류가 일상화된 글로벌한 현대 사회에서는 더욱 더 그 위력을 드러낸다. 바이러스의 공격은 개인을 일상생활을 넘어 도시, 국가 공동체의 작동을 위협하고, 마침내는 전 세계인을 공포로 몰아넣는다.


그런데 다시 돌이켜보면 이러한 상황에 이르기까지 며칠이나 걸린 것일까. 되도록 집밖으로 나가지 않으며 이렇게 움츠러든 생활을 한 지가 얼마나 된 것일까. 멀리 거슬러 올라가면 2019년 10월에 전염병에 대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고 하나, 공식적으로는 12월에 중국 우한에서 처음 발생한 뒤 언론에 오르내리다 1월 하순 경 감염이 급속히 확산되고 우한 의료진까지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게 되자 중국이 전 세계에 코로나-19의 존재를 본격적으로 알린 것은 불과 1, 2개월 전이다. 한 두 달 만에 사람들은 사회적 격리라는 윤리적 의무를 이행하며 각자의 집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 국가들은 전염병 환자가 많은 나라의 입국을 제한하거나 금지한다. 그 어느 정치·경제적 사건도 이렇게 빠른 시간 안에 사람들의 생활과 심리를 뒤흔들 수는 없다. 아마도 전쟁 외에는 말이다. 대대로 전승되는 DNA가 인간의 무의식에 있다면 사람들은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역사는 전쟁의 끝없는 반복이었듯이 전염병의 반복이었음을. 전쟁처럼 그것은 ‘나’와 ‘너’의 죽음, ‘우리’의 죽음을 가져왔다는 것을, 그리고 앞으로도 또다시 가져오리라는 것을. 인류를 공포로 몰아넣은 전염병은 코로나-19 이전에도 무수히 있었고 이후에도 끊임없이 우리 인간을 공격해올 것이다.



죽음을 들이마시는 숨과 고립된 개인


프로이트의 말대로 인간의 내면에 파괴 본능 즉 죽음 본능이 잠재되어 있다면 그것은 죽음에의 공포와 동전의 앞뒷면처럼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1938년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침공하자 영국으로 피신했던 유대인인 프로이트는 그 자신 죽음에 대한 공포 속에서 인간의 야만적 폭력성을 성찰했다.1) 전쟁은 우리가 나중에 얻어 입은 문명의 옷을 발가벗기고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숨어 있는 원시적 야만성을 노출시켜 낯선 사람을 적으로 낙인찍고 그 적을 죽이거나 적의 죽음을 바라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적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결국 이쪽에서 적을 죽이지 않으면 상대방 쪽에 의해 죽게 되므로 양쪽 모두 항상 죽음의 공포를 껴안고 있어야만 한다. 전염병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일 것 같지만, 관계는 매우 불균형적이다. 바이러스인 적은 공포를 결코 내보이지 않으며 일반 시민으로서의 개인들은 적을 공격할 무기가 전혀 없고 사회적 격리라는 방어태세를 갖추고 집구석에 처박혀 고립된 채로 있어야 한다. 물론 바이러스를 퇴치할 치료제를 개발 중인 극소수의 사람들도 있으나, 대부분의 일반 시민들은 크건 작건 죽음에 대한 공포를 껴안은 채 일상생활을 영위해 나가야 한다. 겉으론 아무렇지 않은 척 하지만 각자의 내면엔 갑자기 닥쳐온 죽음에 대한 공포가 도사리고 있다.


바이러스는 인류보다 오래 전부터 존재해 왔다고 한다. 우리는 바이러스가 얼마나 강력한 생명력을 가지고 살아남아 호시탐탐 인간을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는지 그다지 의식하지 않은 채 살아간다. 왜냐하면 너무나 작아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너무 작아 눈에 보이지 않기에 쉽게 망각하고 갑작스러운 공격에 어쩔 줄 모르는 것이 우리 인간이다. 12년간 개미의 세계를 실제로 관찰하며 개미의 사회와 인간의 사회를 비교하며 소설 『개미』2)를 써서 아주 작은 개미의 시선으로 인간사회의 모습과 그 한계를 보여주고자 한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바이러스의 입장에서 바라본 세계를 상상한다면 어떤 내용일까. 그는 소설 『나무』3)에서 안락버스를 탈출하여 산 속에 공동체를 만들어 저항하는 노인들에게 헬리콥터로 독감 바이러스를 살포하여 죽음으로 이끄는 모습을 통해 바이러스를 생화학무기로 그려낸 바 있다. 다시 말해 과학이 최고로 발달한 미래 사회에 있어 인간을 죽음으로 몰고 갈 수 있는 최상의 무기로 바이러스를 상정한 것이다. 백신이 없다면, 인간은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의 공격 앞에서 인간은 아무런 저항도 못해본 채 죽을 수밖에 없다.


예전부터 가장 큰 재앙을 불러온 전염병들은 대체로 물과 공기를 통해 전파된다. 콜레라는 물을 통해, 페스트, 인플루엔자4), 메르스, 코로나-19 등 다른 대부분의 전염병은 공기를 통해 전파된다. 그리하여 물은 전염병 예방을 위해 위생활동이 집중되는 대상이었고, 이와 더불어 신선한 공기가 강조되었다. 숨을 쉬지 않는 순간 인간은 죽는다. 숨 쉬는 것은 인간의 생명을 유지하는 데 가장 필요한 활동임에도 우리는 일상적으로는 별다른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채 살아간다. 그 가장 기본적인 것이 힘들어질 때 파괴되는 것은 바로 일상생활이다. 마치 사진 속의 물체에는 변화가 없는데 색조만 바뀌어 칼라 사진이 흑백 사진으로 변해버린 것과 같다. 갑작스러운 격리 상태, 텅 빈 거리, 방호복을 입고 방역을 하는 사람들과 방역 차량들, 뭔가 그것은 재난 영화에서 본 장면처럼 잿빛 세상처럼 다가온다. 전염병은 예측불허의 재난이 진보한 과학 기술의 발달을 통해 갖춘 안전관리통제시스템을 한 순간에 무너뜨릴 수도 있음을 가장 잘 보여준다. 백신의 개발은 요원하고, 항원 대변이를 거친 신종 바이러스가 출현하고, 매일 전 세계의 대도시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간다는 뉴스가 끊임없이 전해지고, 사람들은 더욱 더 집안 깊숙이 고립된 상태로 살아야 한다면, 어딘가 그것은 종말이라 부를 수 있을 정도의 세상일 것이다. 역사적으로도 전염병은 전쟁보다 더 강렬하게 종말론에 대한 생각에 불을 지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이렇게 빠르게 전 세계인을 하나의 심리로 묶을 수 있는 것이 있을까. 겉으로 보이지 않는, 게다가 너무 조용하게 찾아오는 바이러스에 의한 전염병은 세계인을 삶에 대한 기쁨과 희망이라는 긍정적인 측면보다는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이라는 부정적인 측면에서 하나로 묶는다. 여기에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철학과 세계관이 설 자리는 그다지 많지 않다. 단지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 그리고 이것에서 빠져나가려는 욕망만이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긍정적인 것은 이토록 부정적이고 극단적인 지점에서 한 개인의 몸과 마음이 인류라는 ‘몸들’의 그것과 가장 하나로 된다는 점이며, 이것이 살아있는, 생생한 욕망과 결부되어 있다는 점이다.



출구로서의 공동체와 남겨진 것


주디스 버틀러는 슬픔이 자아를 구성하는 사회성, 즉 복잡한 질서를 가진 정치 공동체를 사유할 기반을 드러낸다고 하면서 슬픔을 ‘나’라는, 한 개인으로서의 주체를 우리 모두와 연대할 수 있는 끈이라고 말했다.5) 그렇다면 전염병으로 인한 재난의 상황은 결코 비극적인 것만은 아니게 된다. 사람들은 갑작스러운 고립 속에서 기이하게도 다른 사람들과의 연대감을 느낀다. 다름 아닌 인간 존재로서의 연대감이다. 그것을 달리 표현한다면 ‘세계에의-존재로서의 몸’의 인식이 아닐까. 메를로-퐁티에 따르면, 우리들 각자가 사랑이니 야망이니 하는 특수한 환경에 들어설 수 있기 위해서는 먼저 일반적인 세계에 속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나의 유기체는 세계의 일반적인 형식에 선인칭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익명적이고 일반적인 실존이다. 이러한 나의 유기체는 나의 인칭적인 삶 아래서 타고난 복합체의 역할을 한다. 즉 일반세계라 불리는 비인칭적인 실존의 여백으로서 인칭적인 실존을 나름의 일반적이고 비인칭적인 리듬들로 휘감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비인칭적인 리듬들을 통해 타인들과의 삶을 공유한다. 선인칭적으로 연속해서 일어나는 일반세계와 내 몸과의 연결은 나에게 비인칭적인 실존을 마련해준다. 그래서 진정한 ‘나’는 비인칭적인 실존과 인칭적인 실존이 결합되어 있는 장소이자 발현이라고 볼 수 있다. 메를로 퐁티는 이것을 ‘세계에의-존재로서의 몸’이라고 칭했다. 개인은 일상의 행동에 있어서도 습관적인 몸의 층위와 현실적인 몸의 층위가 때로는 조화를 이루고 때로는 충돌하면서 지각하고 실천하며 살아간다. 즉 현실적으로 수행되는 대자적이고 인칭적인 몸뿐만 아니라 습관적으로 수행되는 즉자적이고 비인칭적인 몸이 함께 활동하기 때문이다.6) 전염병으로 어쩔 수 없이 고립된 개인들은 비인칭적 실존의 결핍을 통해 더욱 뚜렷이 그것의 존재를 인식한다. 다시 말해 나의 몸은 세계에의 몸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공동체 의식이다. 이제까지의 ‘나’라는 한 개인의 일상생활에 항상 타인과 함께 했음을 깨닫게 된다. 아마도 전염병을 물리치고 난 후 우리에게 긍정적인 것은 집안에 고립되어 있다 밖으로 나와 세상의 환희를 전과 다르게 느낄 수 있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바깥의 소중함을 좀 더 소중하게 인식하고, 이전의 시계추 같던 우리의 일상을 새삼 소중하게 느끼게 되는 것이다. 전염병의 확산이 가져온 공포심은 이전보다 존재의 소중함, 세계에의-존재로서의 몸의 소중함을 일깨워준다.


하지만 전염병이라는 재난의 경험 앞에서 인간과 세계에 대한 물음은 이전과 동일할 수 없다. 전염병은 인간과 세계에 대한 질문을 바꾼다. 전염병이 사라진 이후의 눈앞의 세계는 이전과 동일한 세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전보다 더욱 재난에 있어 윤리적, 도덕적, 사회적 책임이 많이 요구된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전염병을 불러온 우리 세계, 우리 인간 자신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수행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를 더욱 더 위험한 나락으로 떨어뜨릴 강력한 바이러스가 다시금 공격해올 것이다.


카뮈의 소설 『페스트』 말미에 보면, 페스트가 오랑 시에서 완전히 물러나 창문마다 다시 인기척이 나고 사람들은 자신들이 살아남았다는 안도감에서 환호하기 시작했으나, 주인공인 의사 리유는 이 현상을 잠시 중단된 유보적인 상황으로 본다. “시내에서 올라오는 환희의 외침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리유는 그러한 환희가 항상 위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되새기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그 기쁨에 들떠 있는 군중이 모르고 있는 사실, 즉 페스트균은 결코 죽거나 소멸하지 않으며, 그 균을 수십 년 동안 가구나 옷가지들 속에서 잠자고 있을 수 있고, 방이나 지하실이나 트렁크나 손수건이나 낡은 서류 같은 것들 속에서 꾸준히 살아남아 있다가 아마 언젠가는 인간들에게 불행과 교훈을 가져다주기 위해 또다시 저 쥐들을 흔들어 깨워가지고 어느 행복한 도시로 그것들을 몰아넣어 거기서 죽게 할 날이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7) 리유는 페스트균이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 수면 아래 잠겨 있다가 인간이 한때 방만해진 틈을 타 다시 공격할 것임을 뚜렷이 인식한다. 카뮈의 이 소설은 전염병으로서의 페스트를 다루고 있지만 사실 페스트라는 전염병은 은유적인 의미를 지닌 것으로서 부조리한 전체성, 인간본성이 지닌 폭력성의 표출로서의 독일의 나치즘, 소련의 공산주의, 미국의 자본주의까지 우려하며 쓴 작품이다. 그에게 전염병이 확산된 세계와 부조리한 전체성이 지배하는 세계는 다를 바가 없다. 그것은 모두 인간을 부조리한 죽음에 직면하게 만드는 상황들이다. 까뮈는 그러한 부조리한 죽음에 직면하여 그것에 반항함으로써 잠자던 의식이 깨어나고 그 의식이 깨어 있는 한 인간은 살아 있다고 말한다. 전염병이 휩쓸고 지나간 후 남겨진 것, 남아 있어야 할 것은 인간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인간의 깨어있는 의식이다. 그것이 언젠가 다시 인간을 공격해올지 모르는 또 다른 전염병에 대한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될 것이다.





1) 프로이트, 김석희 옮김, 『문명 속의 불만』, 열린책들, 2003.
2) 베르나르 베르베르, 『개미』, 이세욱 역, 열린책들, 2001.
3) 베르나르 베르베르, 『나무』, 이세욱 역, 열린책들, 2008.
4) 1918년 인플루엔자로 인한 전 세계의 사망 인구는 2,000만 명에서 많게는 세계 인구의 5프로 이상인 1억 명에 달했으며, 당시 식민지 상황이었던 한국에서도 15만 명 이상의 사망자를 낸 것으로 보고 있다.
5) 주디스 버틀러, 『젠더 허물기』, 조현준 역, 문학과지성사, 2015.
6) 조광제, 『몸의 세계, 세계의 몸』, 이학사, 2004, 115쪽.
7) 알베르 카뮈, 페스트, 김화영 역, 책세상, 1991, 410쪽.

 



* 이 글에 포함된 의견은 저자 개인의 견해로 제주평화연구원의 공식입장과는 무관합니다.
--------------------------------------------------------------------------------------------------------

기획: 도종윤(제주평화연구원 연구실장)
편집: 한유진(제주평화연구원 연구조교)
저자 박규현 교수는 성균관대 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다. 파리8대학에서 현대불문학 비평분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경희대, 수원대, 성균관대에서 근무하였고, 성균관대 프랑스어권 연구소 책임연구원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근대한불외교자료 I, II, III』(2018, 선인), 『유럽문명의 아프리카 기원』(2015, 지식을 만드는 지식), 『동과 서 마주보다』(2011, 성균관대출판부), 『몸과 문화』(2009, 성균관대출판부) 등을 펴냈다.
Tag +